당직근무. 남이 하지 않는 나만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by xian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약 4개월째 주말마다 당직근무를 하고 있다 (물론 평일근무도 하고 주말근무도 하는 당직근무가 아닌, 평일에 휴일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당직근무이니 여건이 아주 나쁜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저녁에 좀 늦게 퇴근하긴 하지만 아침 출근 시간도 그만큼 좀 늦고, 기본적인 일만 잘 해 주면 특별히 간섭받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업무의 강도도 평일 업무에 비해서는 높지 않다. 물론 내가 없는 시간에 대해 공유된 업무는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따로 지시가 내려온 부분도 해야 하고, 사고가 터지면 평소엔 서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수습해야 하기 때문에 솔직히 사고가 나지 않기를 늘 바라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사고가 없으면 약간의 딴짓(그렇다고 회사를 이탈하거나 근무시간을 빠지는 딴짓은 아니다)을 해도 상관없다. 그리고 딴짓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본업(게임)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라 업무능력에 도움이 나름 된다(이건 좀 아니다.-_-) 하지만 어쨌든,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늘 돌아가야 하는 회사 일을 나에게 이틀씩이나 '믿고 맡긴' 회사의 신뢰에 대하여 배반하는 일도, 불성실하게 보답하는 일도 나에게는 없다. '딴짓'역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딴짓의 부류는 몇 가지가 있는데, 일단 가장 많이 시간을 들이는 것은 '게임'이다. 더욱이 나는 좋아하는 장르와 싫어하는 장르, 잘 하는 장르와 잘 못 하는 장르가 너무도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에, 단 10분을 해 보더라도 많은 게임을 두루 경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얼마만큼 많이 자르고, 많이 볶았느냐다"라는 중화일미의 대사는 단지 요리사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시간을 들이는 것은...... 솔직히 고백하자면 WOW다. 용서를.)

다음으로 시간도 만만찮게 들이고 생각도 만만찮게 하는 것은 내 포지션의 문제이다. 이 바닥에 일한 지 만 4년을 넘어 5년째가 되는 지금, 앞으로 내가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하려면 어떤 특기를 더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나를 갈고 닦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만 많이 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부분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수집하고 있지만... 역시나 어렵다. 그만큼 이 업계가 '게임을 좋아하는 것'이란 동류항은 강했을지 모르지만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업계보다 덜 체계적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내가 개척하면 된다는 생각을 해 본다(어차피 레드오션에서 피떡되고픈 생각은 없으니)

세 번째로 다양한 게임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역시나 업무에 관한 것이다. 회사에 진행되는 업무는 구성원 간에 공유가 되지만 아무래도 얼굴 맞댈 때만큼의 공유는 되지 않는 게 사실. 더욱이 메일로 와야 할 사실이 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일이라 해도 내가 무언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간접 경험에 내 노하우(라고 말하면 거창하지만)를 버무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그 생각한 바를 짧은 시간에 문서로 옮겨 공유하거나, 전달한다. 생각은 긴데 왜 문서로 옮기는 시간은 짧느냐...... 간단하다. 내 글 같이 긴 글은 동료나 상사들이 절대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딴짓은 음식이다. 내가 사는 강북에서 강을 건너면 음식값은 비싸진다. '싸고 맛있는 집'을 종종 볼 수 있는 강북과는 달리 강남에서는 그런 집을 찾기 어렵다(특히 내 회사 주변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은 집도 있지만 '비쌀 수록 맛있다'가 이 곳의 법칙으로 보인다. 그래서 주머니가 넉넉지 않은 평사원의 신분일 경우 대개 그냥 맛이고 뭐고 무시하고 저렴한 집에서 한끼를 때우거나 편의점에 가거나 그러기 쉽다. 

나도 재작년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의 회사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틀 당직근무 중에 한 끼는 고기를 먹든, 초밥이나 참치를 먹든, 최소 몇만원 이상 하는, 양질의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서 해결하고 온다.(절대 내 형편이 남들보다 좋아서가 아니다.) 행동 반경이 좁아서 그렇지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초밥이나 일식 정식, 참치횟집을 가 본 건 꽤 되고, 돈 많으면 한우고기 파는 데에서 살치살이나 차돌박이도 구워먹어 본 적이 있고, 돈이 좀 없으면 돼지갈비나 항정살, 가브리살 파는 곳으로 가고, 이탈리아 음식을 파는 데가 생기면 어디든 가 본적도 있다 (물론 사전 지식 없는 상태에서 가다 보니 피를 본 적도 꽤 많다. 더욱이 재료의 신선도가 꽝이면... 나는 악마로 돌변하기도 한다.) 

가장 압권은 혼자 '후터스'를 가 본 것이었는데 여종업원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놀리듯 말하니까 샌님처럼 얼굴 발개져서 헤벌레했던 그 때의 모습이란. 하나님 맙소사!! 내가 생각해 봐도 최대 굴욕이었다. 30대 초반 아저씨가 이게 뭔 일이래. (다만 예외가 있다면 아무런 이유 없이 혼자 온 사람을 박대하는 집은 그냥 나와 버리고,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 이전에 아시아차우가 그랬다. 썩을.) 그런 나를 아는 이들 중에는 박봉의 월급쟁이가 먹는 데에 뭐하러 그리 쓸데없는 돈을 들이냐 하는 이들도 있는데, 뭐 거기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나름 이유가 있다. 그 '나름 이유'중에 한가지 밝힌다면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겨도 내 씀씀이는 별로 줄 일이 없다는 핑계다. 물론 이 말을 듣는 이들은 웃지만, 정말, 진심으로, 핑계만은 아니다. 그냥 내가 먹는 것에 숟가락 하나 더 놓고, 내가 조금만 덜 먹으면 적어도 데이트 비용은 내가 혼자 먹을 때 돈 드는 것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직근무를 서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내 직업이 휴일에 쉬느냐 아니냐가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직업이 아니라 해도 휴일에 시간이 나는 다른 이들이나 가족들과 시간대가 맞지 않는 것은 분명히 좀 고달픈 일이고, 무엇보다 우리 회사에 있는 구성원들 중 '솔로'가 나 하나뿐이라는 것이라는 점은 - 사실 그래서 내가 당직근무를 하는 것이 가장 조직에 피해가 적고, 나도 그런 점을 알고 있기에 협의한 것이긴 하지만 - 늦은 시간에 퇴근해서 행복하게 서로의 품에 안겨 있는 이들을 부러우면서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이다. 또 그럴 때면 죽은 그 애 생각도 나고 해서 슬플 때도 있다.

근무를 순환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 여자친구를 만드는 것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의 일과 지금 내가 누리는 시간에 만족하고, 내가 딱히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다. 무엇보다 워커홀릭에 게임홀릭인 이 비뚤어진 인간의 눈에는 지금 들어오는 사람이 없고, 올해 본 열댓 번의 맞선에서 계산 전과 계산 후의 얼굴이 달라지는 모습을 매 번 경험한 뒤엔 더더욱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조심스럽고, 두렵고, 무섭다.

그렇기에 어쩌면 나는 - 인간관계만을 놓고 보면 - 나의 당직근무는 내가 '숨어 있기 좋은 방'을 마련하기 위한 도피행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지만, 그리고 오프라인에서의 인간관계를 이끌어나가는 기술이 매우 부족함을 절감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관계에 국한되었을 때에 약간의 정당성을 가질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멀리뛰기를 하려면 도움닫기를 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야 하듯이, 잠시 한발 물러서서 무엇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이들이 나의 포지션, 나의 위치, 나의 역할, 그리고 앞으로 내가 걸어나가야 할 길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대개 많은 것을 버린 뒤에야 그런 시간을 가지는 것을 보아 왔던 나는, 내가 가진 것을 가장 최소한으로 포기하고도 - 무엇보다 집이 어려운 상태에서 일을 쉬지 않고 -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 가끔은 당직근무만 하다가 아예 없는 존재로 묻혀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당직근무만을 맡길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때에 맞는 준비를 이미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일을 지금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일이되, 나에게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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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알겠어요 2007/11/26 09:02 #

    멋진 자세, 멋진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WOW를(...)
    이번 주, 정말 멋진 한 주가 되셔요.
  • xian 2007/11/27 00:15 #

    알겠어요 // 감사합니다. 어느덧 만레벨 3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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