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진부함: 아직도 스타크래프트만이 e스포츠이고 프로인가 by The xian

스타크래프트 종목이 주축이 되어 시작한 대한민국 e스포츠는 한때 전 세계 e스포츠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세계적으로는 실력 있는 선수들을 바탕으로 e스포츠에서 지속적 이슈를 발생시키는 나라임에는 틀림없으나 전체적인 흐름만 놓고 보면 글로벌화와 종목 다변화에 실패하고 국내의 인기도 뒷걸음질치면서 방송사 및 게임단 규모가 축소되는 등, 발전이 아닌 퇴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형국이지요. 나름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습니다만, 새로운 종목은 아직까지 궤도에 올라왔다고 보기는 어렵고, 방송사도 세 개에서 두 개로 줄어들었으니(다만, 애니박스는 아직까지는 거의 GSL 전용이지요) 당장은 동력이 많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e스포츠진흥법이 마련되었다고는 하나 그냥 달랑 법안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고 시행령 마련하고 그에 맞는 시스템 가지고 제대로 프로젝트 하려면 빨라야 올해 하반기에서 내년 상반기가 되겠지요. 이런 상황일수록 저는 e스포츠의 각 주체가 기본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게이머는 좋은 경기를 하고, 방송사는 그 경기를 시청자들에게 잘 보여주고, 언론은 다양한 e스포츠의 재미요소와 흥미거리를 대중에게 알리고, 협회는 다양한 종목에 대해 제대로 지원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새로 출발해야 하는 e스포츠에 아직도 구제도의 모순이나 낡은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타파해야 할 생각들이 컴퓨터 안의 악성코드처럼 아직도 찐득하니 붙어 있어 껄쩍지근합니다.


최근 모 e스포츠 사이트에서 박정석 선수의 라이브 인터뷰가 올라왔습니다. 올드게이머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반가운 인터뷰 기사라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기사 서두에 박정석 선수더러 과거 4대천왕(임요환-이윤열-박정석-홍진호)으로 불렸던 4명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선수라고 서술한 대목을 읽는 순간부터 직설적으로 말해 구역질이 나더군요. 거기에다 한 술 더 떠 프로게임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30대 프로게이머 후보라고 말할 때에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습니다. 박정석 선수를 폄하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스타크래프트 외의 다른 종목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런 고리타분한 소리가 나오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 진부함을 겨우 참아내면서 인터뷰 기사를 읽다 보니 박정석 선수가 되레 안쓰럽더군요. 다들 아시는 일이지만, 기존 e스포츠 세력들은 황제 임요환과 천재 이윤열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 (그것도 그냥 선수가 아니라 오랜 경력을 가진 준 레전드, 레전드들을) 단지 스타크래프트2 종목으로 활동 영역을 변경했다는 이유로 아마추어 취급하며 헌신짝처럼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는 것처럼 은퇴(?)한 황신 홍진호도 스타크래프트2 종목에 모습을 내밀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계는 새로운 상징들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는 이슈몰이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그나마 아직 스타크래프트에 남아 있는 레전드급 선수들에게 아직도 착취할 것이 남았는지 황제와 천재와 황신의 뒤를 이어 영웅 박정석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유일한 4대천왕', '유일한 30대 프로게이머 후보' 등의 수식어가 바로 그 증거지요.


30대 프로게이머라는 말이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이 클리셰는 e스포츠의 생명력에 대한 대외적 평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겨우 한때의 오락질이라고 비웃는 인간들에게 그만큼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례니까요. 그렇기에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서는 임요환 선수가 스타크래프트에서 활동하던 시절 성적이야 어떻든 임요환 선수의 나이를 가지고 지독히도 울궈먹으며 '30대 프로게이머 임요환'이라는 말로 e스포츠의 가치와 선수 수명을 실제보다 부풀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클리셰가 다시 박정석 선수에게 떠맡겨진 셈이지요. 하지만 과거처럼 스타크래프트 외의 다른 종목을 KeSPA의 힘으로 다 죽이거나 깔아볼 수 있었을 때라면 모르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지금 이런 식의 행동은 솔직히 말해 낯간지럽습니다. 박정석 선수에게 30대 프로게이머라는 클리셰를 부여하고, 현존하는 유일한 4대천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작위적이고 식상하며, 무엇보다 엄연히 살아 활동하는 다른 선수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일단 임요환, 이윤열 선수가 팬들 곁을 떠난 적 없고 프로게이머를 그만두지도 않았다는 것은 다들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그들이 내팽개친 것은 KeSPA가 부여한 자격일 뿐입니다. 임요환, 임재덕 선수는 엄연히 프로게임단에서 30대 프로게이머로 활동 중이고 (다들 아시다시피 임재덕 선수는 재덕신이라 불리며 우승까지 했고 코드S 자리를 2011년 내내 유지 중입니다.) 또 다른 4대천왕의 일원인 이윤열 선수의 경우 30대는 아니지만 작년에 GSL 투어에서 4강까지 오르는 등, 2011년 내내 코드S의 자리를 유지하며 활약 중이지요. 그런 상황과 빗대어 보면 아무리 박정석 선수에 대한 인터뷰라 하지만 제대로 경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선수에게 30대 프로게이머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느니 하는 신파조 인터뷰 기사는 오히려 박정석 선수의 명성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지금까지 이걸 읽어보고 '임요환, 이윤열이 스타1 더 안 하는 건 맞지 않느냐. KeSPA 프로게이머가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 팬들이 그러는 것은 제 입장과는 다르지만 이해합니다. 원래 팬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종목만 보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 종목은 헐뜯지만 않아도 다행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e스포츠 관계자들이나 언론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더욱이 생존을 위해 종목 다변화와 글로벌화가 필요하다고 그들 스스로 인정한 자들이 아직도 이런 식이라면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셈이니 더더욱 문제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만일 스타크래프트2가 KeSPA가 인정하지 않은 종목이니 e스포츠가 아니거나, 임요환, 이윤열, 임재덕 선수가 프로게이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e스포츠계나 게임계에 있으시다면 저는 그런 기준은 지금까지는 몰라도 앞으로는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는 것이 일하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충고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잘못된 행동들은 e스포츠의 다양한 종목들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저작권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스포츠는 엄연히 저작권자가 따로 존재하는 게임을 가지고 행하는 스포츠입니다. 그렇기에 협회라고 해도 e스포츠에서 맘대로 모든 권한을 누려서도 안 되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언론이 특정 종목을 맘대로 무시하거나 배제할 권한도 없습니다. 지금 개최되고 있는 GSL 같은 스타크래프트2 대회를 특정 언론이 프로가 아니라 이벤트리그로 부르거나, 워크래프트3 종목 선수들을 아마추어 취급하는 것은 그저 비뚤어진 기득권을 취하기 위한 행동이나, 고리타분한 진영논리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타크래프트2나 워크래프트3을 비롯한 국내외의 다른 e스포츠들은 엄연히 저작권자가 공인하는 주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프로 스포츠이고 임요환, 임재덕, 이윤열 선수 등의 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들이나 워크래프트3의 다른 종목 프로게이머들은 프로게임단에 소속되었든 아니든 엄연한 프로게이머입니다. 그런데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협회가 공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종목의 프로게이머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글로벌 e스포츠에 걸맞지 않은 낡은 사고방식이고 패거리주의, 집단주의에 찌든 사고방식입니다. KeSPA가 구제불능이라 노력을 안 한다면, 언론이 그런 종목을 포용하려는 생각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배제하고 무시하고 있다면 e스포츠의 글로벌화가 될 리 만무하고, 다른 종목의 대회가 열린다 한들 언론이 제대로 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게임인으로서 e스포츠에 주변인으로 맴도는 사람 치고, 지금까지 저는 적잖은 e스포츠 관계자 분들을 만났습니다.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 소중한 시간을 가졌던 것에 감사함을 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와 감사한 시간을 나눈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입장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적어도 e스포츠에 대한 애정은 어떤 형태로든 가지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이 e스포츠를 성장시켰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글을 빌어 분명히 말해야겠습니다. 아무리 그 동안 e스포츠 관계자 분들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투자해 애정을 쏟아부어 e스포츠를 성장시킨 공로가 있다 한들, 이제는 스타크래프트 종목만이(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담당하는 종목만이) e스포츠이고 프로게이머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명색이 관계자라는 분들께서 아직도 그런 식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중대한 잘못입니다.

e스포츠 기사들을 보면 공공의 명분으로는 e스포츠의 재도약과 발전을 위해 다른 종목을 유치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아직도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팬심이나 스타크래프트만이 e스포츠였던 시절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말들이 눈에 띕니다. 다른 종목이 KeSPA를 무조건 인정해야 한다거나, 스타크래프트에서 활동 중인 선수가 다른 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스타크래프트 당시 인지도를 개입시키며 부정적인 논조를 은연중 드러내거나, 이번의 박정석 선수 라이브 인터뷰처럼 아직도 스타크래프트 =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단 = 프로게이머라는 식의 고루한 등식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행동들, 이게 정말로 e스포츠를 위한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스타크래프트가 주는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스팀팩이나 맞게 해 주는 일일 뿐이지요. 아니, 과거의 향수조차 만족 못 시키고 있잖습니까. 이번 대한민국 e스포츠 대상에서 프로리그가 e스포츠 역사의 대부분인 양 선전했던 영상. 그게 과연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왜 이걸 아무도 문제삼지 않습니까.


e스포츠 전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토대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부분을 드러내야 할 분들께서 애정의 좋은 부분을 닮아가는 게 아니라 애정을 빌미로 팬심의 편협한 면을 닮아가는 것은 e스포츠에 재앙입니다. e스포츠는 도약해야 합니다. 말로는 다변화와 글로벌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도 스타크래프트 종목만을 e스포츠 전체와 동급으로 판단하고 다른 종목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고루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약하는 e스포츠의 발목을 잡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e스포츠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끝으로, 본의 아니게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된 박정석 선수는 물론이고 임요환, 이윤열, 임재덕 선수를 비롯한 타 종목에서 활약하는 프로게이머들이 고리타분한 스타크래프트 제일주의로 상처받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 The xian -


덧글

  • RuBisCO 2012/01/07 04:14 #

    사실 방송사가 이렇게 줄어버린데는 스타만 그렇게 지독하게 우려내고 또 우려내다 보니 질려버린 시청자들이 그냥 안보고 말아버린게 크죠.
  • The xian 2012/01/09 16:47 #

    사실 그게 가장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큰 이슈가 너무 많다 보니 인정을 안 한다는 것...
  • 리사 2012/01/07 05:01 #

    자기들 스스로 매니악의 길로 가고 있네요 POWER 자멸!
  • The xian 2012/01/09 16:47 #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랬지요.
  • 딩딩 2012/01/07 07:51 #

    스타1이 싫은건 아닌데 너무 우려먹고 있다능 ㅜㅠ 다른 게임도 많은데 ㅠㅠ
  • The xian 2012/01/09 16:47 #

    문제는 아직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 鴻朙 2012/01/07 09:39 #

    괜히 ㄱ스파가 스타1협회라 불리는 게 아니죠.
  • The xian 2012/01/09 16:47 #

    그렇습니다.
  • 무명병사 2012/01/07 12:02 #

    레드 얼럿2 출시 직전에 '프로게이머' 인터뷰가 있었죠. ..."그런 건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오직 스타크래프트 뿐이다." ...10년도 더 전의 이야기지만 왠지 불안했었죠. 그리고 결국은......
  • The xian 2012/01/09 16:47 #

    뭐 프로게이머는 그럴 수 있습니다. 단거리달리기 하는 사람이 크로스컨트리 관심 안가진다고 뭐라고 할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언론이나 권한을 가지신 분들이 그러면 안 되죠.
  • 메이 2012/01/07 23:09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군요.
  • The xian 2012/01/09 16:46 #

    감사합니다.
  • 2012/01/09 13:1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The xian 2012/01/09 16:46 #

    다른 종목의 지원은 너무할 정도지요. 괜히 김성식 선수 금메달 따고 중계진이 통곡을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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