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원로 게임인과의 만남 by The xian

오늘, 아니, 어제네요. 게임계에서 오래 계시거나 게임을 오래 해 보신 분이라면 이름 혹은 게임을 들어봤을 만한 원로 게임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대외 활동을 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쓴 글에 그분의 게임이 언급되어 있는 게 반가우셔서 이리 저리 물어 만나기를 원하셨다고 하시는군요. 참 송구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일이기도 해서 업무가 끝나고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분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저는 그저 이름 없는 회사의 존재조차 미미한 게임인 중 한 명이지요. 그런 제가 게임 역사에서나 들었던 분을 만나 몇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하는 시간 동안 게임인의 입장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게임계의 현실을 매우 개탄하고 계셨는데, 그분 이야기 중에는 공감이 되는 부분을 넘어서서 할말을 잃게 만드는 이야기들도 있더군요. 제가 들으면서 과연 이게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우선, 시민단체나 여성부가 비논리적인 근거로 게임을 모욕하고, 신문에서 누가 자기 이름을 걸고 게임을 욕하는 등 잊을 만 하면 모든 것이 다 게임 때문이라고 말하며 학부모들의 공포와 불안감을 이용해 게임 규제에 찬성하는 여론을 만들고 셧다운제 등의 규제를 통과시키는 지금 상황에서 돈 많이 벌고, 배운 게임인들 중 어느 하나 그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론하고 논파하려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개탄하셨습니다. 뭐 규제를 앞세운 이들에게 대놓고 반대할 수야 없을지는 모르지만, 게임을 도박이나 술, 담배, 마약과 동일하게 여기는 모욕에 대해서까지 게임계가 적극적 대응을 했냐 하면 제가 보기에도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게임이 도박, 술, 담배, 마약과 동일하게 여겨지도록 놔둔 것을 게임계 기득권자들의 직무유기라고 보는 그분의 시각에 동의한다면 제가 매정하게 보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분이 제작해 한때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지금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이라도 들어봤을 게임이 지금 대한민국에 저작권자 승인 없이 무단 도용되어 다른 이름으로 서비스되고 있고, 그 사실을 지적하자 그 게임(?)을 만든(?) 사장이라는 사람은 직원이 멋대로 한 일이라는 식으로 발뺌을 하고는 그 이후 그에 대한 사과나 잘못을 인정하는 일 없이 계속 서비스를 강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치 보좌관 드립을 하는 어떤 개떡같은 작자들을 면전에서 보는 것 같은 혐오스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돌아와서 그분이 알려주신 게임(?)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니 참으로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더군요. 눈으로만 딱 봐도 그분이 한 말이 거의 대부분 사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눈 내내 그분은 나이가 드신 건 둘째치고, 자신의 게임을 도둑맞았다는 사실과, 기본적인 권리 인정이나 기본적인 권리 방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게임의 이미지나 게임계의 위상이 다시 음지로 추락할지도 모르는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정말로 힘드셔 보였습니다. 더불어 지금과 같이 게임을 혐오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게임인들의 멘탈이 정말 걱정된다고 하시더군요. 안타까웠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들려주신 말은 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만 말씀하실 게 아니라 게임인들을 몽땅 모아 놓고 일갈하실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통 상식적으로는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콘텐츠를 만든 분이라면 원로로 인정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 업계의 행사마다 초대되고, 강연이나 인삿말 등을 하고, 공로를 인정받는 등의 영예가 뒤따르는 것이 보통이지요. 하지만 지금 그분의 행색이나 그분에게 가해진 도용행위는 그분이 아무리 중간에 업계를 오래 떠나셨던 점을 감안한다 해도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윤택한 삶을 살거나 하는 것은 그분이 바라신 것도 아니라고 하셨지만, 갖은 어려움과 간절한 바람 끝에 만들어 내 해외에서도 지금까지 존중받는 게임을 정작 조국에서는 도둑질당한 그 심정을 대체 뭐라고 위로해 드려야 할까요. 저는 도저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누가 될까봐 그분의 실명과 대상 게임을 공개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분위기를 보고 눈치챌 분은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The xian -

덧글

  • 레인 2012/01/11 02:20 #

    지금 게임업계는, 솔직히 그냥 개같습니다. 말씀하신 마따나 기득권층이란 것들은 그저 돈을 뽑아낼 생각만 하고 있지, 몇년동안이나 게임업계를 물어뜯고 있는 이 상황에 전혀 대처할 생각이나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죠.
  • The xian 2012/01/11 10:07 #

    소극적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 매드캣 2012/01/11 09:00 #

    사실 패키지 시장이 망한 이후로 게임업계는 꿈도 미래도 없는거 아니었습니까?
  • The xian 2012/01/11 10:08 #

    어쩌면 그런건지도 모르겠네요.
  • FlakGear 2012/01/11 09:05 #

    게임 회사일은 딱히 제앞에 닥친일이 아니라서 케세라세라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 미래가 걱정되긴 합니다;; 원하는 일은 있는데 원하는 일을 못할 것같은 기분.
  • The xian 2012/01/11 10:08 #

    할 수는 있습니다. 단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뿐이고 많은 것이 제한될 뿐이죠.
  • 르혼 2012/01/11 09:16 #

    국내 게임 역사에 족적을 남기고 해외에서까지 인정을 받았으며 현재도 복제품이 서비스할 정도의 게임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군요.
    일단은 온라인 게임일 테고, MMORPG가 정립된 이후의 넥슨이나 NC의 온라인 게임 (즉, 리니지 이후의 게임) 이라면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은 이상 제대로 대접 받고 살고 있을텐데 말이죠.

    그렇다면 머드나 머그 게임 제작자일텐데, 그 시절의 머드나 머그가 그렇게나 '돈이 되는' 물건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걸 복제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면 나름의 수익 모델을 추가해 넣은 경우겠고, 그렇다면 저작권 행사는 어렵겠지요. 일단은 실용신안 같은 것에 해당되니까요.
    그나마 게임에서 사용되는 그림 정도라면 저작권을 주장하는 데 무리 없겠습니다만, 프로그램 코드는 전문가라 하더라도 도용임을 쉽게 입증하기가 어려운 일이고, 게다가 다들 아시다시피 게임 기획은 단순한 '아이디어'로 취급받아서 아예 지적재산권을 인정받지 못하니까 그냥 오픈소스라고 생각할 수 밖에요.
  • The xian 2012/01/11 10:12 #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증명되는 이야기입니다.
  • 메이 2012/01/11 10:23 #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군요
  • The xian 2012/01/11 10:27 #

    제가 다 먹먹해지더군요.
  • 2012/01/11 10:2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The xian 2012/01/11 10:27 #

    좋을 것이 없다기보다는 지금 제가 말하면 그분께 누가 될것 같아서 말을 안 할 뿐이죠.
  • 칼리토 2012/01/11 10:35 #

    흠. 내심 그 게임명이 궁금해집니다만...
    솔직히 1세대 게임개발자인 저 분의 사례 이외에도,
    게임계(개발) 내에서 벌어지는 물리고 물리는 싸움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진흙탕이 따로 없죠.
    관계 없는 사람도 들으면 욕나올 정도니 말 다했습니다.
    하물며, 그런 정보도 걸러져서 듣는 일반인들이야 오죽할까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밖에는 안 보입니다.
  • The xian 2012/01/11 12:49 #

    뭐 저야 제 할일 하기에도 바쁜 몸이지만, 확실히 문제인식과 의식이 필요한 상황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 2012/01/11 11:3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The xian 2012/01/11 12:50 #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들은 이야기 중에는 없었습니다.
  • 하르 2012/01/11 12:06 #

    이 나라는 어디서부터 뒤틀린걸까요...
  • The xian 2012/01/11 12:51 #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통계 위젯 (블랙)

2939
255
3059102

A타입 클린 캠페인 위젯

2011 이글루스 TOP 100